여행

[충남 예산군] 卍수덕사 수덕여관 이야기

철없는 신선 2024. 3. 19. 15:12

유일하게 남아있다는 백제시대의 사찰 卍수덕사는

대한 불교 조계종 제7교구본사로서 대웅전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3층 및 7층 석탑등

눈에 보이는 것들 대부분 문화재라고 생각하면 된다. 

 

친구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卍수덕사의 산채 비빔밥이

먹고 싶다면서 한국 근대사의 사연 많은 단편 영화 같은 수덕사

일주문 바로 옆에있는 수덕여관에 대한 이야기를 보내왔는데....

내일은 수덕사에 산채 비빔밥이나 먹으러 가야 되나.....


🍎🌱🍒 卍수덕사 수덕여관  세 남자, 세 여자 이야기

세 여자란~

김일엽(1896~1971) 한국 최초 TOKOY 유학생, 작가→여성운동가→승려

나혜석(1986~1948) 서양화가, 작가, 여성운동가, 언론인. 김일엽의 양모

박귀옥(이응로 화백의 본부인)

※ 김일엽, 나혜석, 윤심덕(1897~1926) 성악가 : 근현대 신여성의 시조

세 남자란~

송만공 스님(1871~1946) 독립운동가, 석가모니 이래 제76대 조사

이응로 화백(1904~1989) 한국출신 프랑스화가, 동양화가,

일당 김태신(1922~2014) 김일엽과 일본인사이에 난 사생아, 화가,

                                 김일성 초상화 그림. 한국불교 미륵종 제5세 종정

「 수덕사 일주문 옆에 있는 초가집 한 채는, 너무나도 유명한 당대에 쌍벽을 이룬 김일엽스님과 나혜석의 전설 같은 이야기가 서린 곳이다.

한국 최초의 신시 여류시인 김일엽은, "그처럼 꽃답던 사랑도 단지 하루의 먼지처럼" 털어 버리고 1928년 그의 나이 33살에 속세를 접고 수덕사 견성암에서 탄옹스님으로부터 수계를 받고 불가에 귀의하자,
'글 또한 망상의 근원이다'는 스승 만공선사의 질타를 받아들여 붓마저 꺾어버린다.

1934년 이혼 후 극도로 쇠약한 데다, 어린 딸과 아들이 보고 싶어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있던 나혜석은 수덕사로 직행하지 않고 수덕사 일주문 바로 옆에 있는 수덕여관에 여장을 풀었다.
김일엽이 암자에서 내려와 두 사람은 반갑게 회포를 풀었지만, 한 사람은 여성을 옥죄는 사회제도가 한없이 원망스러운 이혼녀이고, 또 한 사람은 그것을 초월한 여승이었으므로, 두 사람의 대화는 평행선을 달렸다.

"너처럼 중이 되겠다"는 나혜석의 부탁에, "너는 안 돼"라고 일엽이 만류했지만 "만공 스님을 뵙도록 도와줘"라는 나혜석의 간청에 못 이겨 마지못해 김일엽은 만공스님 면담을 주선한다.
몇 년 전 경성에서 속세를 접고 여승이 되겠다고 속내를 털어놓는 김일엽에게 "현실 도피의 방법으로 종교를 선택해서는 안 된다"라고 면박을 주던 나혜석이 이제는 처지가 바뀌어 같이 머리 깎고 중이 되겠다고 하는 것은 역설적이지만 그만큼 이 땅에서 신여성으로 살아가기 힘들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만공 선사로부터,어느 날. "엄마가 보고 싶어 현해탄을 건너왔다"는 열네 살 앳된 소년이 수덕사로 김일엽스님을 찾아온다. 그 소년은 김일엽이 일본인 오다 세이죠와의 사이에 낳은 김일엽의 아들인 김태신이다.
모정에 목말라 있는 아들에게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말고 스님이라 불러라"라고 냉정하게 말하는 김일엽을 보고, “어쩜 저렇게도 천륜을 거역할 수 있을까?”라고 느낀 혜석은 모정에 굶주린 그 소년이 잠자리에 들 때 팔베개를 해주고 젖무덤을 만지게 해 준다.

나혜석 역시 모성애에 주려 있는 세 아이의 엄마다.
이러한 모습을 바라본 김일엽은 속세의 연민을 끊지 못하는 나혜석이 중노릇은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김태신은 이후에도 어머니 김일엽을 찾을 때마다 수덕여관에서 묵는데, 나혜석은 마치 자기 자식을 대하듯 팔베개를 해주고 자신의 젖을 만지게 하는 등 모성에 굶주린 일엽의 아이를 보살핀다.

나혜석은 수덕여관에서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면서 김태신(후에 일당스님)에게 여러모로 영향을 끼치는데...
나혜석과 특별한 교분이 있는 청년화가 이응로도 자주 찾아와 이들과 함께 그림에 대한 이야기와 실습으로 시간을 보내고…….,이러한 연유로 김태신도 후에 북한 김일성 종합대학에 걸려있는 김일성 주석의 초상화를 그릴 정도로 유명화가가 된다.

충남 홍성이 고향이고, 해강 김규진 문하에서 그림에 대한 열정에 불타고 있던 이응노에게는 파리에서 그림 공부를 하고 돌아온 나혜석은 둘도 없는 선배이자 스승이어서 자주 만나려 수덕여관을 들른다.
그러다가 두 사람은 함께 이 산속 외진 곳에서 아예 같이 기숙한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누나 같은 스승이자 선배 화가일 뿐 애정관계는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이응로에게 파리의 환상을 심어 준다.

누나처럼 선생님처럼 따뜻하게 대해주던 선배 화가 나혜석과의 인연으로 수덕여관에 정이 들어 버린 이응노는 1944년 나혜석이 이곳을 떠나자 아예 수덕여관을 사들인 다음, 부인 박귀옥에게 운영을 맡기고, 6.25 때에는 피난처로 사용하는 등…. 6년간 살면서 수덕사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화폭에 옮긴다.

나혜석으로부터 꿈에 그리던 파리 생활과 그림 이야기를 들은 이응노는 1958년 드디어 21세 연하의 연인 박인경과 함께 파리로 떠나 버린다. 홀로 남은 그의 본부인 박귀옥이 여관을 운영하나 글자 그대로 소박 떼기 청상과부가 되어 버리고 만다. 머물다 미련 없이 떠나 버린 두 사람과는 달리 박귀옥 여사는 변치 않는 애정과 절개로 이국땅의 남편을 그리며 수덕여관을 지킨다.

박귀옥여사가 외로운 시절을 보내고 있는데, 뜻하지 않게 이른바 “동백림사건”으로 1968년 이화백이 납치되어 형무소에 수감된다. 박귀옥은 한결같은 지극정성으로 이화백의 옥바라지를 한다. 
출옥 후 이화백은 수덕여관에서 몸을 추스르면서 그녀 곁에 잠시 동안 머무른다
새파랗게 젊은 여자와 떠나 버린 남편을 병구완하는 박귀옥 여사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런 부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 화백은 아마도 그 마음을 추슬러 여관 뒤뜰에 있는 너럭바위에 추상문자 암각화를 새겼으리라.....

그리고는 “이응로 그리다,”라는 사인까지 남겨 놓은 뒤“이 그림 속에 삼라만상 우주의 모든 이치가 들어 있다.”라고 말하고는 파리로 또 훌쩍 떠나 버린다.
박귀옥 할머니는 이 암각화를 바라보며 어느덧 팔순을 앞둔 세월까지 남편을 기다려 온다.
그러나 죽기 전에는 꼭 다시 만나 볼 수 있으리라 실낱같은 희망으로 살아왔지만, 고암은 1992년 귀국전시를 앞두고 파리에서 눈을 감고 만다.

장례식에도 가볼 수 없는 박귀옥은 마지막 소원으로 이응로 화백의 유골이라도 돌려받아 자신이 죽으면 함께 묻히고 싶어 한다. 그녀는 고암이 파리로 떠날 때 그의 출세 길에 지장이 될까 봐 이혼수속을 허락해 준 것이 그렇게 후회스러울 수가 없다. 이제 그녀는 고암에 대해 아무것도 주장할 수 없는 법적으로 남남의 처지였던 것이다. 그녀의 방에는 젊은 시절 남편과 함께 찍은 사진과 고암이 남겨 준 갈대꽃이 핀 강가에 홀로 서있는 오리그림이 걸려 있다.

고개를 내밀고 어느 곳인가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꼭 자신의 처지처럼 느껴진다고 말한다.
2001년 초 수덕여관 주인 박귀옥 여사가 92세를 일기로 돌아가신다.
그리고 이 수덕여관도 폐허와 전설 속으로 서서히 사라져 가는 것이다.
이제 수덕여관과 수덕사에 얽힌 추억의 인물은 김태식 한 사람만 직지사에 생존해 있다.

일본의 권위 있는 미술상인 아사히상을 수상하고, 현재 김일성 종합대학에 걸려있는 김일성주석의 초상화를 그린 것으로 유명한 일당스님(김태신) 그가 바로 일제 강점기 한국 최초의 여자 유학생이자 당대 최고의 비구니로 칭송받던 일엽스님의 외아들이라는 것이 처음으로 공개돼 화제다.

67세에 불가에 귀의하여 80세 노인이 된 노스님이 털어놓는 그리운 나의 어머니, 그리고 파란만장했던 삶의 이야기... “  어머니란 존재는 각박하고 외로운 이승에 내 던져진 영혼의 안식처입니다.
나의 고독, 나의 절망, 나의 기쁨, 나의 소망은 모두 어머니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로 인해서 갈증을 느꼈으며, 또한 어머니로 인하여 제 삶은 충만했습니다.
나는 어머니가 뿌리치는 옷자락에 엉겨 붙은 눈물 같은 존재였습니다.

”일본에서 화가로 더욱 유명한 일당스님은 자전소설 "어머니 당신이 그립습니다."를 출간하면서, 그가 한국 비구니계의 거두 일엽스님(1896~1971)의 아들이라는 것을 세상에 드러냈다.
일엽 스님이 입적한 지 31년 만의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