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석루(矗石樓)와 정문부(鄭文孚)
휴가라고 애들이 할아버지 산소도 가볼겸 진주를 가 보자고 한다. 기특한 녀석들 같으니라구....
그런데 현재까지는 나도 그냥 형님들한테 말로만 듣고 지냈던 내용들만 고향에 대한 이야기를
애들한테 해 주었는데 좀 더 정확하고 신빙성있는 내용을 전달해 주고져 인터넷을 뒤적거려서
조상에 관한 사항 및 내가 왜 진주에 살게 되었는지 고향에 대한 사항을 정리해 본다
■ 촉석루(矗石樓)
조선시대의 3대 루각은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 밀양 영남루 이다.
현대에 와서는 경복궁의 경회루 및 남원 광한루를 넣어서 5대 루각으로도 말들을 한다.
사람마다 촉석루를 바라보는 느낌이 각자 다르겠지만 나는 조금 색 다르게 바라본다.
나의 고향이기도 하지만 선조들의 발자취가 촉석루 여러곳에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 진주(나이갈진晋, 고을주州)는 고려시대에는 강주(편안할강康, 고을주州)라고 했다
■ 충의공(忠毅公)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1565-1624)
나는 충의공 농포 정문부(1565-1624) 선생의 13대손이다
할아버지께서는 한양출생으로 1588년(선조21)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한성부참군이 되셨다.
중앙 정치에 환멸을 느끼어 함경도 북평사(北評事)로 자진하여 옮겼는데 임진왜란이 났다네....
임란시 선조가 피신하면서 큰아들 임해군, 5번째 순화군을 함경도 회령으로 피신 시켰는데
그 당시 죄를 짓고 귀양온 "국경인,국세필"이 반란을 일으켜 일본군에게 왕자들을 넘겨주고
그 댓가로 회령 및 경성을 다스렸다. 그래서 반란을 진압하고져 공(公)께서 의병을 모집하여
반란군뿐만이 아니라 두만강 부근의 친일파 모두 처형해 버렸다. 요즘말로 싹3 했다네...
■ 의병대장 정문부
반란 진압 및 왜군과의 전투등으로 얻은 신뢰로 따르는 인물도 늘어 나고 의병도 점차 늘어나
7천명으로 늘어 났으며 일본군에게 빼았겠던 여러 읍과 진을 수복하여 길주지역에서 활동하면서
관북지역을 평정했는데, 이런 여러 전투를 통 틀어서 "북관대첩"(北關大捷)이라고 한다.
따라서 임란 후 1등공신이 되고 영흥부사 등 여러 지방관을 거쳐 예조참판에 이르렀다. 또한
그 후 형조 및 병조참판을 차례로 제수 받았으나 거절하고 고을 원을 택했는데, 그 이유는
중앙 정치판의 심한 당쟁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전한다. 그리하여 마지막에는 창원부사,
전주부윤을 끝으로 관직을 마감하신다.
그런데 말년은 불우했다. 나무가 우뚝 솟아나면 나무꾼이 나무를 베는 법칙에 의거하여
1624년 이괄의 난에 연루 되었다는 음모로 옥살이중 고문을 받다 돌아 가셨는데,
후에 신원(伸寃: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어 좌찬성에 추증 되었다
임란후 창원부사 당시에 진주성 폐허를 둘러보면서 진주의 풍광과 인심을 본 공(公)께서
자식들은 정쟁에 휘말리지 말고 한양을 떠나 진주로 내려가 살라는 옥중유언을 했는데
형은 내동면 까꼬실(현 진양호, 나는 초등학교 졸업때까지 살았음)에, 동생은 이반성면
용암에, 삼촌은 산청 삼장에 각각 터를 잡고 살았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우리 일족들이
까꼬실에 집성촌을 이루면서 살게된 역사였다. 뿌리가 있으니깐 역사로 남는 구나…
●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
관북(현재 함경도)지역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활동과 공로가 1500여 글자로 기록된 비석이다
정문부장군의 승리를 기념하여 숙종 34년(1707)에 길주군(현재 함경북도 김책시 임명동)에
세워져 있었던 전승기념비인데, 러일전쟁(1904~1905) 당시 일본군 육군소장 이케다 마사스케가
전리품으로 약탈하여 일본 군국주의 상징인 야스쿠니 신사 뒤쪽에 1톤이나 되는 돌덩어리를
얹어놓아 대첩비의 기를 눌러 놓고 있었는데, 많은 노력으로 2005년 10월 21일 무려 100년 만에
되찾아왔고 북한은 복원된 북관대첩비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보유적 193호'로 등록하고
김책시 인민위원회 이름으로 북관대첩비를 설명하는 표지석과 안내석도 세워서 보존중이다.
■ 촉석루에 남아있는 선조의 흔적
그래서 그런지 촉석루를 바라보면 많은 시문 현판들이 누각 기둥 및 천정에 즐비하지만
그 중 남쪽 벽에 걸려있는 한시 액자에 당연히 눈이 먼저 간다. 임란후 창원부사 시절에
처참하게 폐허가된 진주성을 둘러보고 정문부 할아버지께서 읋은 시다.
옛날에 형들이 자기들도 정확한 내용은 모르면서 했던 이야기는 " 촉석루에 걸려있는
현판 액자의 시 중에 지은이가 鄭씨면 대충 집안 할아버지라고 생각하면 된다 "라고
알려 준 것이 왜 그렇게 이야기 했는지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된다.
촉석루 판상시 - 정문부
龍歲兵焚捲八區 임진년 난리가 조선팔도 휩쓸 적에
魚殃最慘此城樓 재앙은 이 성루가 가장 처참했다오.
石非可轉仍成矗 구르지 못하는 돌은 촉석이 되어 섰건만
江亦何心自在流 그래도 강물은 하염없이 흘러만 가네.
起廢神將人共力 신도 사람을 도와 일으켜 주려 하는데
凌虛天與地同浮 침범을 당한 이 세상 온통 들떠만 있네.
須知幕府經營手 모름지기 알 것 같은 이 고을 다스리던 솜씨
壯麗非徒鎭一州 장하고도 훌륭한데 어찌 한 고을만 지키랴.
■ 진주성(晋州城 )
왜란 때 진주성은 두 번의 큰 싸움이 있었다.
◎ 첫 번째는, 선조 25년(1592)으로 왜군이 군량미를 얻기 위해 곡창지대인 전라도로
진군하려고 진주성을 공격한 일로, 정규군인 김시민(金時敏)장군이 싸워 대승한 싸움이고
◎ 두 번째는 이듬해(1593)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특명으로 전년의 패전을 설욕할
목적으로 왜군 10만명과 싸운 전투다. 당시 경상우도 절도사였던 최경회(崔慶會)와 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의 합동군 3,500명 그리고 6만 진주시민이 함께 싸웠으나, 참패하여 살아남은
자가 없었다 한다. 의기 주논개는 최경회의 여인 후처였다.
진주성은 사적 제118호이다
■ 주논개(朱論介)와 의암(義巖) 바위의 유래
대부분 진주하면 먼저 나오는 소리는 촉석루, 진양호, 남강, 진주냉면, 진주 비빔밥 그리고
논개를 얘기하는데 논개의 성이 주(朱)씨라는 것을 알고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당시 왜군이 승전보의 자축연을 벌일 때, 논개가 적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유인하여 남강에 함께 투신했던 바위가 바로 의암 바위이다.
이 바위의 서쪽면에 전서체로 義巖이란 두 글자가 보이는데, 이 글씨는 아버지 농포공의
참변(고문으로 옥중 사망)을 겪고 눈물을 흘리면서 진주로 온 농포공의 둘째 아들 정대륭
(鄭大隆)공이 이 바위 이름을 "의암"이라 명명하고 "의암"이란 글씨까지 바위에 새겨넣은
것이라고 한다.
참조: 남쪽 면에 있는 義岩이란 해서체는 후대에 한몽삼이 쓴 것임
■ 의기논개지문(義妓論介之門)
의암 바위 가까운 곳에 의기논개지문(義妓論介之門)이란 간판이 붙어있는 조그만한
정자속 돌 비각에 있는 시인데 계속 읽어 보아도 깨끗한 명시 같다.
경상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353호
義 巖 의 암 - 정 식( 鄭 栻 )
獨峭其巖 特立其女 가파르게 홀로 선 그 바위, 우뚝 선 그 여인
女非斯巖 焉得死所 저 여인, 이 바위 아니면 어디서 죽을 곳을 얻으며
巖非斯女 烏得義聲 저 바위, 이 여인 아니면 어찌 의롭단 말 들으리.
一江高巖 萬古芳貞 한줄기 강에 높은 바위, 만고에 꽃다우리라.
지은이는 역시 鄭씨 이고 촉석루 안에 걸려있는 "촉석루 중수기"를 쓰신분인데 정문부
할아버지의 동생 용강공(龍岡公) 정문익(鄭文益)의 증손, 정식(鄭栻, 1683~1746)공이
지은 시라고 한다
ㅁ 정문부 장군묘가 왜 의정부에 있는가
할아버지께서 말년에 의정부 송산에서 시부를 짓고 농포집 5권을 남기셨다.
아무래도 집 주변에 묘역을 만든 것으로 알고있고, 묘 윗쪽에는 부모님 묘 및
5대조의 묘도 같이 있다.
출처: 남강문학협회, 정태수 촉석루에 오르면, 다음백과,두산백과등에서 인용 및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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