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충남 부여군] 부여군 백제문화를 찾아서

철없는 신선 2018. 7. 7. 23:30

 

 

 

 

1) 무량사

고려시대에 크게 중창하였으며, 생육신의 한사람인 방랑하는 천재시인, 또한 선비 출신이면서 승려가 되어 기행을 벌인 기인이라고도 하고, 최초로 남녀간의 사랑을 주제로 한 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은 작가라고 말하기도 하는 김시습(金時習)이 이 절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입적하였다.조선 중기의 고승 진묵(震默)이 나무 열매로 술을 빚어서 마시면서 시심(詩心)을 펼쳤던 사찰이다.

보물 제356호로 지정된 극락전에는 동양최대의 불좌상인 아미타여래삼존상이 봉안되어 있고, 보물 제233호로 지정된 무량사석등과 보물 제185호로 지정된 무량사오층석탑, 절 문 앞에 있는 거대한 당간지주(幢竿支柱), 김시습의 부도 등이 있으며, 산신각에는 김시습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 무진암 : 김시습의 부도가 있다는 암자

 

 

 

 

 

 

 

 

 

 

 

 

 

 

 

 

 

2) 백제문화단지

17년에 걸쳐 완공한 백제문화단지는 웅장한 백제문화유산의 흔적을 잘 표현해 놓은 것으로 한번 정도는 꼭 봐야할 곳 같다. 백제의 왕궁인 사비궁, 백제의 왕실 사찰, 오층석탑등은 단지에서 가장 인기있는 볼거리 건축물이다. 위례성은 한성백제 시기의 성으로 사비궁과는 다른 시대 백제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단지 전체를 볼려면 제형루에 올라가면 된다고 하는데, 영화셋트장 같이 지어놓은 기와집은 많이 보았으니깐 나는 살짝 스쳐지나간다...

 

 

 

 

 

 

 

 

 

3) 자온대 , 수북정 , 조룡대

▶ 자온대(自溫臺):

백제 의자왕이 강 건너 왕흥사로 예불을 들이기 위해 갈 때 이곳에서 잠시 쉬면 바위가 저절로 따뜻해져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아마도 신하들이 알아서 데워 놓았겠지만 하여간 그렇다고하는데 ....), 강쪽의 절벽에는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쓴 것으로 알려진 ‘자온대(自溫臺)’라는 글씨가 있다.

▶수북정(水北亭):

 부여팔경 중 하나인 수북정 * 조선 광해군 때 양주목사를 지낸 김흥국(金興國, 1557~1623)이 인조반정을 피해 이곳에서 살면서 지었다는데 동에는 부소산(扶蘇山)과 나성(羅城)이 있고 정자 밑에는 백마강(白馬江)이 맑게 흐르고 있다(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100호) 부여팔경(扶餘八景)중 하나이다.

▶ 조룡대釣龍臺) :

백마강 상류에는 겨우 한 사람 정도 앉을 수 있는 크기의 바위가 하나 있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용을 낚았다는 전설을 지니고 있는 조룡대다. 소정방은 조룡대에서 용을 낚을 때 용이 좋아하는 말을 미끼로 썼는데 백마를 미끼로 용을 낚은 강이라 하여 백마강이라 불렀다고 한다. 전설출처 《신증동국여지승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는 하지만, 용을 잡는다고 백마를 사용했다고 ~ ㅍㅎㅎ

 

 

 

4) 궁남지

백제본기 무왕 35년(634)조에 궁의 남쪽에 연못을 파서 왕과 왕비가 큰 연못에 배를 띄웠다.『삼국유사』기이제2 무왕조에는 “무왕의 이름은 장(璋)으로, 그의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서울 남지(南池) 주변에 집을 짓고 살던 중, 그 못에 사는 용과 정을 통하여 장을 낳고 아명(兒名)을 서동(薯童)이라 하였는데, 그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가 어려웠다”라고 하였다. 백제가 멸망한 뒤에는 훼손되어졌던 연못이었다.

공주갔다가 돌아 오는길에 부여 궁남지 연꽃을 보고 가자는 생각으로 부여를 갔는데, 연꽃축제중이라서 시내전체가 주차장이다. 혼자서 속도전으로 관광하기 때문에 안보면 안보지 이렇게 기다리는 것은 시간적인 여유가 있을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집으로 발길을 돌린다. 

 

 

5) 부여정림사지

백제 성왕이 538년 봄, 지금의 부여인 사비성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도성 안에 관청 및사찰 등을 건립할 때 나성으로 에워싸인 사비도성의 중심지에 정림사가 세워졌다. 정림사와 왕궁의 관계는 중국의 북위(北魏) 낙양성(洛陽城) 내의 황궁과 영녕사(永寧寺)의 관계와 흡사하여 사비도성의 기본구조가 북위의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한다. 정림사지 오층석탑 1층 탑신 표면에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전승기념비적인 내용이 새겨져 있다.

백제시대의 석탑인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국보 제9호)과 고려시대 때 만들어진 높이 5.62m의 석불인 부여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보물 제108호)이 남아 있어 백제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계속 법통이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6) 부소산성

538년(성왕 16) 熊津(웅진, 지금의 공주)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천도하여 멸망할 때까지 123년 동안 국도를 수호한 중심산성 이었다.

 

7) 구드래 조각공원

구드래’는 ‘구들돌’에서 비롯된 명칭이다. 백제 왕이 배를 타고 왕흥사에 예불을 드리러 갈 때 먼저 사비수(백마강) 언덕에 있는 바위에 앉아 부처님을 향해 망배를 하였다. 그러자 왕이 앉았던 바위가 저절로 따뜻해져서 이곳을 구들돌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구들돌이 다시 구드래로 변하여 오늘날의 지명이 되었다고 한다. 구드래나루터는 사비시대 백제 도성의 포구로 중국이나 일본의 배가 드나들던 곳이다.

 

7) 고란사, 낙화암

고란사(高蘭寺):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백제 때 왕들이 노닐기 위하여 건립한 정자였다는 설과 궁중의 내불전(內佛殿)이라는 설이 전하며, 백제의 멸망과 함께 소실된 것을 고려시대에 백제의 후예들이 삼천궁녀를 위로하기 위해서 중창하여 고란사(高蘭寺)라 하였다. 그 뒤 벼랑에 희귀한 고란초가 자생하기 때문에 고란사라 불리게 되었다

▶ 낙화암(落花岩):

백마강은 공주를 지나온 금강이 부여를 지나가는 한 구간을 말한다. 부여의 옛 지명은 소부리(蘇扶里) 또는 사비(泗泌)였다. 의자왕 20년(660) 사비성은 신라ㆍ당나라 연합군에게 함락되고, 성내에 살던 궁녀 및 도성에 남은 여인들은 부소산성으로 피신하였는데 침략군이 부소산성까지 몰려들자, 백제 여인들은 적군에게 잡혀가 치욕스러운 삶을 사느니보다 차라리 푸른 강물에 몸을 던져 무너지는 국운과 함께 여자의 정조를 생명보다 더 소중히 했다는, 백제 마지막 순간까지 지키려 했던 백제 여인들의 충절과 넋이 어린 곳이 바로 낙화암이다. 바위 절벽에 새겨진 ‘낙화암(落花岩)’이라는 글씨는 조선시대 학자인 우암 송시열 선생이 쓴 글씨이다.

 

8) 능산리고분군

능산리고분들은 사비시대(538~660)의 백제 왕족묘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