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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卍고승들] 대각국사 의천, 천태종의 창시자

철없는 신선 2020. 3. 22. 23:00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


고려시대승려,  천태종의 창시자
1055년 문종(고려 11대왕)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명 왕자승려 !
1065년(문종19)에 출가하여(11살) 화엄종 및 유교의 가르침을 두루 섭렵했고.
1077년(23살) 화엄경과 그에대한 연구서를 강의했다
1101년(47세) 국사로 책봉, 책봉된지 2일만에 입적함
화엄학과 천태학의 차이점을 찾아서 송나라 유학을 갔으며, 송나라의 철종
황제도 만났고, 고행을 거듭하며 항주,서호 등지의 절을1년2개월동안 돌아
보고 고국으로 돌아와서 "흥왕사"에 머물면서 요,송나라에서 가져온 불경과
원효의 저술을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여 찍어냈다.
의천이 중국 절강성 천태산의 "국청사"를 찾아가 천태종의 교리를 배웠고
국청사는 천태종의 중심 사찰이다. 이 절 앞에는 고구려와 신라의 승려들이
공부할 때 거처했던 신라원이 있다. 그는 그곳에 있으면서 고려에 천태종의
교의를 펴보려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가 새로운 종파(천태종)를 창시한 것은 시대적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이 무렵 선종과 교종의 대립과 갈등이 심화되었고 또한 국제관계로는 북방에서
여진세력이 크게 성장하여 고려를 위협하고 있었다. 의천은 견문도 넓지만
왕자라는 높은 신분도 지니고 있었기에 남다른 지도자의 역할이 요구되었다
천태종의 기본 경전은 《법화경》이다. 《법화경》의 중심 사상은 《화엄경》보다
구체적인 회삼귀일(會三歸一)에 있다. 곧 사람의 등급을 셋으로 나누는데…..
   1, “아무리 모자라는 중생이라도 성불할 수 있다”고 했고 
   2, “마음이 바로 부처이고 중생”이라고도 했다. 
   3, 그러니 셋이 마침내 하나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의천은 부처가 마지막으로 설법한 이 사상을 고려의 현실 및 신분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평등관의 구현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가 존숭하는 선사는 원효였다. 원효(신라승려 617~686)의 화쟁사상을 
어떻게 새로운 환경에 맞는 이념으로 만들 것인지 고심을 거듭하여  
이론과 실천의 양면을 강조하는 교관겸수(敎觀兼修)를 제창했다.
  ㅁ 화엄종을 비롯하여 교의만을 닦는 종파들은 마음의 실체를 버리고 
      바깥에서 허망하게 진리를 찾아 헤맨다고 보았다.
  ㅁ 선종처럼 참선에만 치우치는 종파들은 바깥의 현실은 외면하고 
      마음에만 진리를 밝히려 하여 현실을 소홀하게 한다고 보았다. 
      즉 그는 한쪽에 치우치는 것은 아집이라며 단결을 원했다
의천이 제창한 고려의 천태종은 중국과는 달리 선종에 속하게 되었고 
또한 귀족적이어서 지방 및 일반인에 대한 관심은 크게 보이지 않았다.
당시 천태종에 합류하는 것을 거부하고 조계혜능 이래의 전통적 선종을 
고수한 승려들이 자신들을 조계종(曹溪宗)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따라서 12세기에 들어가면서 불교계는 교종의→  화엄종과 법상종, 
선종의→  천태종과 조계종으로 재편 되었다
의천의 사상은 본질적으로 왕권 강화를 위한 의식 기반과 문벌체제의 타파
라는 시각에서 출발하여 불교의 전반적이고 구체적인 개혁 방향을 제시하지 
못했다. 사찰들은 귀족의 원당으로 전락하여 재산 도피처가 되고 정치권력 
투쟁에 이용되는 등 현실적 모순에 휩싸였고 그가 죽고 난 뒤 불교의 타락은
심화 되었다.
저서 〈대각국사문집 大覺國師文集〉, 〈대각국사외집 大覺國師外集〉, 〈신집원종문류 
新集圓宗文類〉, 〈석원사림 釋苑詞林〉, 〈간정성유식론단과 刊定成唯識論單科〉 , 
〈신편제종교장총록〉 불교사상 최초로 〈속장경〉을 편찬·간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