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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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승려, 천태종의 창시자 |
1055년 문종(고려 11대왕)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명 왕자승려 ! |
1065년(문종19)에 출가하여(11살) 화엄종 및
유교의 가르침을 두루 섭렵했고. |
1077년(23살) 화엄경과 그에대한 연구서를 강의했다 |
1101년(47세) 국사로 책봉, 책봉된지 2일만에
입적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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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학과 천태학의 차이점을 찾아서 송나라 유학을
갔으며, 송나라의 철종 |
황제도 만났고, 고행을 거듭하며 항주,서호 등지의
절을1년2개월동안 돌아 |
보고 고국으로 돌아와서 "흥왕사"에
머물면서 요,송나라에서 가져온 불경과 |
원효의 저술을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여 찍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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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천이 중국 절강성 천태산의
"국청사"를 찾아가 천태종의 교리를 배웠고 |
국청사는 천태종의 중심 사찰이다. 이 절 앞에는
고구려와 신라의 승려들이 |
공부할 때 거처했던 신라원이 있다. 그는 그곳에
있으면서 고려에 천태종의 |
교의를 펴보려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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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새로운 종파(천태종)를 창시한 것은 시대적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
이 무렵 선종과 교종의 대립과 갈등이 심화되었고 또한
국제관계로는 북방에서 |
여진세력이 크게 성장하여 고려를 위협하고 있었다.
의천은 견문도 넓지만 |
왕자라는 높은 신분도 지니고 있었기에 남다른 지도자의
역할이 요구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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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태종의 기본 경전은 《법화경》이다. 《법화경》의 중심
사상은 《화엄경》보다 |
구체적인 회삼귀일(會三歸一)에 있다. 곧 사람의 등급을
셋으로 나누는데….. |
1, “아무리 모자라는 중생이라도 성불할 수 있다”고 했고 |
2, “마음이 바로 부처이고 중생”이라고도 했다. |
3, 그러니 셋이 마침내 하나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
의천은 부처가 마지막으로 설법한 이 사상을 고려의 현실
및 신분 갈등을 |
해소할 수 있는 평등관의 구현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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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존숭하는 선사는 원효였다. 원효(신라승려
617~686)의 화쟁사상을 |
어떻게 새로운 환경에 맞는 이념으로 만들 것인지 고심을
거듭하여 |
이론과 실천의 양면을 강조하는 교관겸수(敎觀兼修)를
제창했다. |
ㅁ 화엄종을 비롯하여 교의만을 닦는 종파들은 마음의 실체를 버리고 |
바깥에서 허망하게 진리를 찾아 헤맨다고 보았다. |
ㅁ 선종처럼 참선에만 치우치는 종파들은 바깥의 현실은 외면하고 |
마음에만 진리를 밝히려 하여 현실을 소홀하게 한다고 보았다. |
즉 그는 한쪽에 치우치는 것은 아집이라며 단결을 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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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천이 제창한 고려의 천태종은 중국과는 달리 선종에
속하게 되었고 |
또한 귀족적이어서 지방 및 일반인에 대한 관심은 크게
보이지 않았다. |
당시 천태종에 합류하는 것을 거부하고 조계혜능 이래의
전통적 선종을 |
고수한 승려들이 자신들을 조계종(曹溪宗)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
따라서 12세기에 들어가면서 불교계는 교종의→ 화엄종과 법상종, |
선종의→ 천태종과 조계종으로 재편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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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천의 사상은 본질적으로 왕권 강화를 위한 의식 기반과
문벌체제의 타파 |
라는 시각에서 출발하여 불교의 전반적이고 구체적인 개혁
방향을 제시하지 |
못했다. 사찰들은 귀족의 원당으로 전락하여 재산
도피처가 되고 정치권력 |
투쟁에 이용되는 등 현실적 모순에 휩싸였고 그가 죽고
난 뒤 불교의 타락은 |
심화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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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대각국사문집 大覺國師文集〉, 〈대각국사외집
大覺國師外集〉, 〈신집원종문류 |
新集圓宗文類〉, 〈석원사림 釋苑詞林〉,
〈간정성유식론단과 刊定成唯識論單科〉 , |
〈신편제종교장총록〉 불교사상 최초로 〈속장경〉을
편찬·간행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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